한국 최초의 에너지 민주주의 현장. 촛불혁명 이후 최대 민주주의 실험. 지난 10월, 울산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중단 여부를 정부에 권고하는 시민 공론화 자리가 열렸습니다. 국민을 대표해 신고리 공론화에 참여한 471명의 시민참여단. 4천2백5십만 명 중의 한 명이 될 확률은 8만 5천분의 1이었는데요. 나눔문화 연구원도 시민참여단이 되어 역사적 자리에 참여했습니다.시민참여단 결정은 '공사 재개'. 민주주의는 한 걸음 앞으로 그러나 탈핵은 한 걸음 뒤로,공론화 현장은 희망과 절망이 함께했던 자리였습니다.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글 | 윤지영 나눔문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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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 기다리던 전화를 받았다. 울산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대통령에게 권고할 500명의 '시민참여단' 참가자에 확정됐다는 연락이었다. 10여 일 전 1차 설문조사는 2만 명, 그중에 참가 의향을 밝힌 이들이 6천 명. 그런데 다시 500명 안에 들었다니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을 맞은 기분이었다. 늘 쓰는 전기,늘 내는 세금 그리고 늘 감당하던 위험.그러나 핵발전은 소수 전문가와 관료에게만 맡겨졌다. 그런데 이제 '국민에게 의견을 묻는다'고 하니 달라진 세상에 대한 실감과 역사적 자리에 간다는 설렘이 밀려왔다. 당시 찬반 여론은 비등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촛불혁명의 빛을 품은 '작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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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2박 3일간의 합숙 토론을 위해 전국에서 모인 시민참여단이 도착한 충남 연수원.



서울역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도착한 충남 산기슭의 연수원. 외부와 격리된 채 모든 일정이 진행된 곳이다. 전국에서 모인 시민참여단은 '작은 대한민국'이었다. 지역, 세대, 계층뿐 아니라 팟캐스트를 듣는 사람부터 MBC 뉴스를 보는 사람까지 정치적 성향도 다양했다.


단 하나 같았던 건 '참여 열의'였다. 9월 16일 오리엔테이션 참석률은 95.6%. 10월 13일부터 진행된 2박 3일 합숙 토론 참석률은 98.5%.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기록이라고 한다. "경청"과 "숙의"가 크게 적힌 휘장이 무대 양쪽에 걸린 본회의장에 시민참여단 471명이 모였다. 애국가도 다들 얼마나 열심히 부르는지^^ 마치 신생 민주공화국의 민회처럼 느껴질 만큼 시민들은 상세한 제안을 쏟아냈고, 토론에 임하는 자세도 시종일관 진지했다. 합숙 토론 한 달 전에 배부받은 자료집을 빽빽한 메모와 신문 스크랩으로 채워왔고, 높은 질의 수준에 전문가들은 놀라워했다. 휴회와 식사 시간에도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고, 새벽 3시까지 일대일 토론을 하는 시민들도 보였다. 


시민참여단의 열성은 그 자신들에게도 놀라운 화제였다. 시민들은 "촛불혁명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 열심히 했을까?"라며 공감했다. 지난 겨울 촛불 광장이 거대한 민주주의 학습장이었음을, 시민참여단은 그 살아있는 증거였다. 80대 할아버지는 "제대 하루 전보다 더 설레었다"고 말했고, 다른 이들도 "나랏일 하러 왔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윗사람들끼리 결정하면 안 되지", "나에게도 의견을 묻다니 신기하다",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공론화 현장은 시민으로서의 자기 존엄을 확인하고 성장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너무 짧은 '숙의'와 실망스러운 전문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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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성과 환경성, 전력 수급 안정성과 경제성 등의 주제별로 진행된 전문가 발표.



'준비된 시민'들이었다. 일각에서 제기한 '비전문성'에 대한 우려는 기우였다. 다만, 두 가지가 아쉬웠다. 우선, 숙의 기간이 짧았다. 자택 학습부터 합숙 토론까지, 33일은 탈핵을 수십 년간 공론화한 독일에 비하면 성급했다. 


그리고 '전문가 윤리' 실종 사태가 심각했다. 핵발전처럼 정보 독점과 은폐가 심각한 전문 분야는 정보의 '투명성'이 필수다. 그러나 양측은 상반된 팩트를 제시할 때가 많았고, 검증할 방법은 없어 혼란이 컸다. 공사 재개 측 전문가는  상대측에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시민참여단은 조별로 '시민참여단 규칙'을 낭독했다. 토론의 예의를 지키자는 약속이었다. 앞으로의 공론화에서는 전문가들의 공개 선서 자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정보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공론화위에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많은 인원을 사고 없이 이끌어 준 노력은 고마웠다. 하지만 시민과 전문가의 개별 접촉 등 반칙 행위를 바로 잡는 적극적인 역할이 보이지 않았다. 공론화위가 분란을 무마하기 급급한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원칙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권위를 보여줬다면 시민참여단의 신뢰는 더 높아졌을 것이다. 



'공사 재개'측의 설득력이 더 컸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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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단이 묻고 싶은 질문을 자유롭게 부착했던 게시판. 공간이 부족할 만큼 빽빽하다. 



10월 20일 생중계로 공개된 시민참여단 결정은 공사 재개 59.5%, 중단 40.5%였다. 참담했다. 하지만 예상했다. 마지막 날에는 박수 크기조차 달랐으니까. 그런데 원전에 대해서는 '축소' 의견이 53.2%였다. '원전은 축소해야 하지만 신규 원전은 지으라'는 모순된 결정이다. "상생의 해답", "절묘한 현명함"이라며 '숙의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현장에서 토론을 지켜본 내 생각은 다르다. 저 모순된 결정의 본질은 핵발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정직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시민참여단 다수는 핵발전을 "필요악"이라고 표현했다. 핵발전소 사고는 인류 최악의 재앙이고, 핵폐기물은 처리 방법이 없으며, 핵발전소 건설과 운영 과정은 도시민의 지역민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필요악'인가? 결국은 '경제'다. 재개 측은 핵발전이 가장 안정적으로, 값싼 전기를 대량으로 공급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제조업 중심인 국내 산업에 큰 도움이 되며, 공사를 멈추면 원전 수출에도 지장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2조가 넘는 매몰 비용도 강조했다. 안전 우려에 대해서는 신고리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전"이라며 "전문가를 믿으라"고 말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위세를 떨친 경제성장 우선주의와 핵발전 안전 신화는 강고했다. 그 강력한 '주술'에 촛불혁명으로 빛을 발한 민주주의가 '다수결'로 동원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값비싼 전기, 핵 참사보다 강력한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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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으로 시청한 공사 현장. 직접 가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중단 측에도 '경제' 카드는 있었다. '원자력은 사양 산업이다. 대안이 있다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대안은 '신재생에너지'였다. 기술 발전으로 발전 단가가 급격하게 하락해 애플과 구글도 뛰어든 유망 산업이 됐다며, 에너지 전환은 "새로운 산업 경쟁력 창출에도 필수"라고 주장했다. 


시민들의 마음이 흔들리던 찰나, 건설 재개 측은 '신재생에너지가 원자력의 발전량을 대체할 대안인가?'라는 반론을 펼쳤다. 신재생에너지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 원자력을 축소하면 수입에너지인 LNG 발전이 늘어나 전기요금이 폭등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건설 중단 측은 전기는 지금도 충분해 그럴 일은 없다고 말했다. 전력 수요 예측에 대한 공방이 벌어졌고, 결국 "일단 짓자"는 원자력 전문가들이 승기를 붙잡았다. 


이처럼 원전을 반대하면 동등한 전력 생산량의 '대안'을 요구한다. 그 전까지 '탈핵'은 미래로 유보된다. 전기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공포가 그만큼 큰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에너지가 끊임없이 공급돼야 하는 도시와 기계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핵발전소를 더 지을 필요 없이, 전기 낭비를 줄이고 사용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직접 체험하기 전까진 믿지 않는다. 핵발전의 폐해는 피해 당사자가 되기 전까진 실감하기 어렵다. 내가 만난 중단 입장 시민들이 태양열 발전을 하고, 농사를 짓고 벌을 치며 환경 변화에 민감하고, 울산에 살다 몸이 아파 이사하고, 한수원에서 일하다 그만두는 등 핵발전을 반대하는 자기 삶과 체험의 근거가 있는 분들이 많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평행선을 달린 '가치관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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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로 모은 백여 개의 질문 중에 대표로 뽑힌 시민이 질의하는 모습.



불길한 예감 속에 마지막 설문조사를 앞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손주 예쁜 줄 알면 핵폐기물은 안돼"라던 70대 농부 어르신은 홀로 앉아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내면의 외침이 응어리가 되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한 시민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원전을 서울에 짓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질문했다. 재개 측 전문가의 답변에 시민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서울은 땅값이 비싸서 안 된다. 이것은 상식이다."10만 년을 보관해야 하는 핵폐기물도 "땅속에 깊이 묻고 잊어버리자는 것이 기본 입장"이라고 했다. 원전 주변 주민들의 암 발병은 "우연"이라고 답했다. 저 발언들이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나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항의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타협할 수 없는, '가치관'의 영역이 불거지면  토론은 불가해졌다. 말싸움이 벌어진 조가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 상황을 시민들은 "평행선을 달렸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뒤따라왔던 말. "우리는 생각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넘어가면,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주류 다수의 논리다. 재개 결정에 보류 입장이던 2, 30대의 변심이 크게 작용했듯이 말이다. 우리가 '공론화'해야 할 진짜 이야기는 아직 남은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되는 '숙의'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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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숙 토론 마지막 날, 시민참여단은 설문조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최종 제출했다. 



최초라는 의미의 무게만큼, 이번 공론화는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나면 안 된다. 탈핵과 민주주의에 대한 숙의, '깊이 생각하고 의논'하는 일은 계속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 결과에 대한 '승복'만을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갈등 봉합'의 수단으로 축소하는 게 아닐까. 


특히 이번 참여단은 수도권이 다수였고, 송전선로 주민 등 피해 당사자들과 10대 아이들이 배제됐다. 그밖에도 재개 결정을 아파했던 분들은 많다. 이들에게도 충분한 발언권을 주는 일은 민주주의 성숙에도 필요한 일이다. 공론화를 계기로 눈물이 흐르지 않는 전기, 진정한 에너지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욱 널리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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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은 나눔문화 격월간 회원소식지
  <나누는 사람들> 2017년 9-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나눔문화 후원회원에게 전해지는 <나누는 사람들>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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